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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다산 정약용 기념관에서....

by sailing park 2011. 4. 30.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는 미용(美庸), 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조선시대에 글 잘하는 정치가로 유명한 강산 이서구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시골에 볼 일이 있어 길을 가다보니 한 소년이 나귀의 등에 책을 가득 싣고 북한산 쪽으로 올라라고 있었다. 열흘 후 이서구가 시골에서 볼일을 다 보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시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이번에는 나귀의 등에 책을 가득 싣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궁금해진 이서구는 소년에게 물었다.

 

"얘야, 넌 뭘 하는 아이냐?"
"저는 이 위에 있는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며칠 전 네가 책을 나귀의 등에 싣고 가는 걸 봤는데, 너는 책을 읽지도 않고 싣고만 다니는 게냐?"
"저는 이 책들을 벌써 다 읽었습니다."
소년의 말에 이서구는 깜짝 놀랐다. 나귀의 등에 실린 책들은 '강목'이라는 책으로 무척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열흘만에 그 책을 다 읽었단 말이냐?"
"욀 수도 있습니다."
이서구는 소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책 중에서 한 권을 뽑아들며 말했다.
"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이서구가 책에 실린 내용을 물어보자 소년은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이서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다오."
이서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한 이 소년이 조선 시대의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그의 아버지가 조정의 치열한 당파 싸움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던 경기도 양주군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임금의 사랑을 받으며 나라의 일에 종사하였다가 서른 두 살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지방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 때 그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를 보고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생각하여 그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을 무렵, 정약용도 이에 관계되어 경상도로 귀양갔다가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동안 못 쓴 책을 쓸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 생각하며 책 속에 묻혀 지냈다.

 

그가 남긴 책들은 500권이 넘는데 후세에까지 남아 나라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는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피운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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